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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크리스마스 이브, 5 ~ 맺음말

by rockorsomething 2024. 12. 24.

 

5

가끔 시간이 꽤 지나도 특정한 광경이 방금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그중 하나는 졸업작품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작업실 바로 옆 건물에서 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생략한다) 학생들이 ‘말 그대로’ 북치고 장구치며 농성하던 그때, 건물 뒤편 쓰레기장에서 관리인들이 분리수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놈들아. 이것이 좌익 엘리트들이 몰락하는 이유다.’

 

6

지난 연애는 완전한 실패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되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툼이 있을 때마다 제대로 대화도 시작하기 전에 사과부터 했다. 그 이전 연애(사실상 첫 연애)에서 헤어짐이 너무 아팠기에 ‘헤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헤어질 때는 이미 마음이 멀어진 상태라 힘들지도 않았다. 이번 연애는 조금 달랐다. 실패를 통해 솔직한 접근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덕분에 지금의 여자친구와 잘 지내고 있다. 사회생활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남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지만, 실수 없이 ‘잘’하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연애와 사회생활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전자는 끝낼 수 있지만 후자는 살아있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래도 전 연애의 실패를 발판 삼아 더 성숙한 연애를 하게 된 것처럼, 지금의 사회생활도 비록 실패할지라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체념과 희망은 생각보다 가깝게 맞닿아 있다.

 

7

지금은 갈 수 없는, 그리운 식당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대치동에서 살던 때, 롯데백화점 뒤 주택가에 있던 대구 막창집이다. 주방을 제외하면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식당으로, 드럼통 탁자 네댓 개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다른 테이블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곳은 내게 이상적인 식당이었다. 작지만 아늑했고, 늘 깨끗했다. 대구에서 올라온 젊은 부부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대치동에 자리 잡았다는데, 그 사실이 어린 나에게도 멋지게 느껴졌다. 그분들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손님들도 행복해 보였다.

음식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진 청양고추와 쪽파가 들어간 된장소스는 그 자체로도 훌륭했고, 막창은 항상 신선하고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유일한 식사 메뉴였던 차돌 된장찌개는 정말 일품이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같이 나오는 밥을 위해 된장찌개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된장찌개를 시키면 갓 지은 냄비 밥이 함께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그 윤기가 흐르던 흰 쌀밥보다 더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친구가 데려간 고급 레스토랑의 솥밥보다도 말이다.

이렇듯 정말 좋아하고 자주 갔던 식당인데 어느 순간 문을 닫았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대구로 다시 내려가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완벽했던 막창집은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대구에서 유명하다는 막창집도 가봤지만, 그곳만큼은 아니었다.

그 막창집을 떠올리니, 초등학생이던 당시 술을 못 마셨던 것이 새삼 아쉽다. 그곳이라면 분명 최고의 술 맛을 경험할 수 있었을 텐데. 쩝. 아무튼 이제 그 막창집에 다시 갈 수는 없겠지만, 사장님 가족이 지금도 잘 지내고 계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특히 자녀분도 나와 비슷한 또래일 텐데, 부모님 바램 대로 서울대 같은 좋은 학교에 진학해 잘 지내고 계셨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추억의 막창집.

 

맺음말

이 짧은 글들은 20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는 도중 틈틈이 써서 엮은 것이다.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당일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분이 상해, 적어도 크리스마스 이브만큼은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전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어 들었다. 첫 글에서도 밝혔듯, 빌린 하루키의 책 네 권 중 가장 얇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의 생일이 12월 24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싶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책의 가장 첫 페이지에 적힌 이 글귀를 읽는 순간,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상념들이 꿀렁꿀렁 글의 형태를 띠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곧 잊혀질 생각들,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추억들까지 끌어올리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써 내려간,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플한’ 그의 소설처럼, 나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정말 심플하고 평범하게 마무리되어 간다.

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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